칼럼

마지막 카운트다운 앞에서

글쓴이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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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으로 봄눈이 내린다.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오래된 질문 하나를 꺼내든다. 우리는 지금 어디쯤 서 있는가.

뉴스를 켜면 중동의 화염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이스라엘과 이란, 두 나라의 충돌은 이제 단순한 영토 분쟁의 문법으로는 읽히지 않는다. 원유 가격은 배럴당 90달러를 넘어섰고, 호르무즈 해협은 언제 막힐지 모르는 병목이 되었으며, 강대국들조차 전쟁의 흐름을 예측하지 못한 채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인간이 설계한 외교의 언어가 자꾸만 헛바퀴를 돌고 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 화약고의 기원이 보인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던 자리에, 영국과 프랑스는 자로 잰 듯 직선의 국경선을 그었다. 사이크스-피코 협정이라 불리는 그 선은 수천 년의 역사와 종교, 민족의 결을 단번에 잘라버렸다. 4천 년의 역사를 가진 쿠르드족은 네 나라로 뿔뿔이 흩어졌고, 태생부터 균열을 품은 국가들은 끊임없는 내홍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었다. 인간의 탐욕이 그어놓은 불완전한 선 하나가,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이 땅을 불태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혼란의 이면에는 역사적 기원보다 훨씬 깊은 무언가가 흐른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에스겔 38장의 예언, 곡과 마곡의 전쟁, 요한계시록이 그린 마지막 시간의 풍경. 이스라엘 언론 CBN 뉴스의 크리스 미첼은 말한다. 지금 우리는 마지막 때를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의 가장 끝자락에 와 있다고. 쿠르드족과 러시아, 미국의 행보를 포함한 모든 지정학적 변수들이 에스겔의 예언이라는 거대한 퍼즐을 이제 맞추고 있다고.

나는 이 주장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자리에 있지 않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느낀다. 세상이 이처럼 불안할수록, 인간은 의미를 찾는다는 것을. 이 혼돈이 그저 우연의 축적이 아니라 어떤 더 큰 서사의 일부이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은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자 희망의 또 다른 얼굴이다.

그런데 이 묵시록적 이야기 한가운데서 내 눈길을 붙잡는 장면이 하나 있다. 전쟁도, 예언도, 핵폭탄도 아닌, 작은 예배당 안의 풍경이다.

발달 장애인들이 눈물을 흘리며 찬양한다. 공연장 입장이 거부되고, 세상의 소음 속에서 자리를 빼앗겨온 그들이, 단 몇 명이라도 좋다며 모여 온 마음으로 노래한다. 그 자리를 위해 프로 연주자들이 최고의 기량을 쏟아붓는다. 숫자가 적어도 상관없다. 단 한 명이라도 그 은혜의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면.

마지막 때를 논하는 웅장한 담론과, 이 작고 조용한 예배 사이의 간극이 내게는 오히려 가장 선명한 무언가를 가리키는 것 같다. 역사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동시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것. 거대한 예언의 성취를 말하면서도, 가장 연약한 이웃의 손을 잡는 것. 그것이 어쩌면 마지막 때를 사는 사람의 진짜 모습일지도 모른다.

전도서는 말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실 것이라고. 그렇다면 역사의 끝에서 우리에게 묻는 질문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너는 거대한 사건들을 얼마나 정확히 해석했느냐가 아니라, 네 곁에 있는 가장 작은 사람에게 무엇을 했느냐.

봄눈은 계속 내린다. 뉴스 속 전쟁의 포연과 이 하얀 눈발이 묘하게 겹쳐 보인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대신, 잠시 커피잔을 들고 창밖 눈길 위를 달리는 자동차들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저마다 어딘가를 향해,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그 모습들.

마지막 카운트다운이 정말 시작되었다면, 그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일은 무엇일까. 나는 아직도 그 답을 찾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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